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문단 편집) == 생애 == 모룽겐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헤르더는 어릴 때부터 문학, 신학,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열여덟이 되던 1762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칸트]]의 제자되면서부터 지리학, 인류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칸트의 친구 하만을 통해서 시와 평론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문학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 카톨릭 학교 보조 교사로 [[리가]]에 간 그는 이곳에서 목사이자 교사로서 활동한다. 그러다 스물셋에 첫 저서 《새로운 독일 문학에 대한 단편》을 익명으로 출간한다. 이후 사회적 불만족과 왕성한 상상력으로 이제까지 간과해왔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리가를 떠난다. 파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교육, 철학, 문학, 종교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윤곽을 그려본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기원, 진행 과정, 목표 등을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선 젊은 [[괴테]]를 만났으며, 감정을 강조한 헤르더의 문학 비평은 이후 괴테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독일 뷔케부르크에 머문 그는 민족 문학과 관련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격려하고, 논쟁적인 종교 저작과 철학 저작들을 발표한다. 이때의 활동은 [[질풍노도]]라고 불리는 독일 문학의 부흥을 알리는 운동의 서막이라 평가된다. 이후 괴테의 도움으로 바이마르에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국가와 시대가 발견할 수 있는 인간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문학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동시에 칸트의 정신 과정의 분석적 분리는 물론 종교에 대한 위협,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칸트]]의 견해를 비판한다. 이에 분노한 칸트의 제자들은 그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말년에 그가 인기가 없이 고립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헤르더의 역사철학, 중세에 대한 관심, 동양학, 언어에 대한 관심, 비교 문학 연구, 본능에 대한 강조, 민요 예찬, 비판적 방법 등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에 속하는 [[프리드리히 횔덜린|횔덜린]], 장 파울, [[노발리스]], [[프리드리히 슐레겔|슐레겔]],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셸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슐라이어마허]] 등 많은 철학자, 문학자들에게 영향을 줘서 독일의 철학 사상과 정치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공로로 1802년 바이에른 제국의회에서 귀족으로 선출[* 귀족이 되면 이름 가운데 "'''von'''" 을 붙인다.]되었으나 1년 뒤 1803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